례가 없던 한글인터넷주소 기술은 차츰 자금의 벽에 부딪치면서 여러 어려움이 찾아왔다. 문제는 돈이었다. 외부의 투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개발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나와 연구원들은 낮에는 사무실에서 기술 개발을 하고 밤이면 PC방 지하실 공사 현장을 돌며 페인트칠과 컴퓨터 세팅으로 일당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푼푼이 모은 돈도 매달 사무실 운영비에 쓰고 나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급여날만 되면 여전히 급전을 빌리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구원들과 함께 이를 악문 1년이 흐를 무렵, 드디어 ‘제3세대 인터넷주소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한글인터넷주소용 응용 프로그램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7월,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한글인터넷주소를 세계 최초로 탄생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 최초의 쾌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술을 알아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벤처기업의 실험적인 기술에 그 누구도 선뜻 투자하거나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 언론에서는 IBI의 한글인터넷주소 시스템 개발이 국내 인터넷 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이 될 중요한 기술 개발이라고 추켜세워 주기도 했지만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기술개발에 성공하면서 기술보호의 기본이 되는 특허 출원을 하려다보니 나는 아예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고 매일매일을 빚 독촉 받는 것이 일이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런 저런 방안들을 찾아내며 빚 독촉을 겨우 겨우 넘기곤 했다.

매 순간 순간을 묘책으로 넘겨야 했던 당시, 나는 우리가 올라야 하는 고지가 너무 높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산맥을 오르다가 포기하고 때로는 죽음을 맞는 것처럼 한글인터넷주소를 개척하는 우리도 그 한계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렇게 막막하던 그 무렵 NIC위원회에서 알게 된 전길남 박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길남 박사는 우리나라에 인터넷을 보급한 주인공으로 국제인터넷주소위원회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코드 도메인인 ‘.kr’의 최초 관리권을 분배받은 분이다. 인터넷 비즈니스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분이 우리나라에 계신 줄조차 몰랐지만, 정작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은 바로 전길남 박사의 선구자적인 역할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기술에 대해 선견지명을 갖고 있던 전 박사는 NIC 위원회에서 만났을 당시부터 우리의 연구에 큰 흥미를 가졌었다. 그렇게 학자적인 관심을 놓지 않던 전 박사가 어느 날 우리에게 아시아?태평양 지역 인터넷 컨퍼런스인 APRICOT (Asia Pacific Regional Internet Conference on Operational Technologies)에 우리 기술을 발표해보라고 주선을 해주었다. 전 박사의 제안을 받는 순간 나는 '바로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무조건 발표하겠노라며 겁도 없이 난생 처음 국제회의무대에 설 것을 다짐했다. 직원이10 명 남짓한 작은 벤처기업의 기술을 국제적으로 저명한 전문가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발표에 앞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1999년 2월 APRICOT 회의는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는데 나에겐 싱가포르로 갈 비행기 티켓조차 구입할 형편이 안 되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창피한 일이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고민하던 중 용기를 내어, 모 은행의 부천 지점으로 향했다. 십 원 한 장 대출 받을 여력이 없는 형편이었지만 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상복 지점장에게 급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 분은 다행히도 5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대출해주었다. 환호가 절로 나왔다. 하마터면 절호의 기회였던 APRICOT 발표를 놓칠 뻔 하였으니 어찌 그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직원 한 명과 부랴부랴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탔고 회의장을 향해 뛰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우리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는데, 객석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심지어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우리를 마치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은 사기꾼처럼 취급했다. 안 그래도 바짝 긴장되어 있던 나로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정말로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고 자문하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전길남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을 조용히 시킨 후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혹 인터넷 기술의 5년 후를 장담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만 이들의 자국어인터넷주소 기술에 대해 논해보십시오!”

그러자 술렁거림은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기술의 속도가 매우 빠르게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은 전문가였던 그들이 더욱 더 잘 알고 있는 일이기에 신기술에 대한 평가를 섣불리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전 박사의 일침이 그대로 먹혀든 것이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소명을 이끌어 주는 셰르파를 만난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실패를 반복하는 히말라야 등정에서 그들의 등반과정을 그림자처럼 돕는 셰르파처럼, 전 박사님도 나에게는 한글인터넷주소의 길잡이 같은 존재였다. 우리의 자국어인터넷주소와 전길남 박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인터넷 컨퍼런스인 APRICOT 에서의 발표가 나에게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도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나는 한글인터넷주소 기술을 개발한다고 뛰어다녔지만 실상은 좁은 세상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내 왔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세계와 넓은 세계의 경계 사이에서, 내가 얼마나 넓은 세상을 향해 이 기술을 만들어내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 그 깨달음의 충격음은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을 통해 나는 한 꺼풀씩 과거로부터 탈태하며 성장해갔다. 아마도 사람이 새로운 세계의 경계를 접하지 못하게 된다면 암흑 속에서 갇혀 지내면서도 그것이 우물 안이고 암흑 속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자신의 세계가 전부인양 착각하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사업을 시작하고 또 새로운 일을 시도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일들의 연속이리라.

APRICOT에서의 발표는 자국어인터넷주소 기술이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도 가치있는 우수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전길남 박사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나의 꿈이 크게 성장하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이후에 우리는 우리나라 초대 정통부 장관으로 전 세계 인터넷주소 관리 기구인 ICANN (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에서 초대 19명의 위원 중 한 분으로 활동하셨던 경상현 전 장관을 자문위원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국어주소 기술과 글로벌 아키텍 설계는 한국인터넷진흥원 NNC (Name & Number Committee)의장을 지내고 한국인터넷진흥원 이사로 활동한 ICU(정보통신대학교) 이동만 박사를 자문으로 모셨고, 전세계 자국어주소와 한글인터넷주소 등록정책은 한국인터넷정보센타 시절 NNC에서 나와 함께 위원으로 있었던 김기중 변호사의 자문을 받았다. 각종 분쟁과 한글인터넷주소에 대한 법과 경제 영역은 서울대 기술과 법센터 정상조 교수가 도와주셨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분들의 도움이 오늘의 전 세계 자국어인터넷주소와 넷피아를 일군 초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꿈 그리고 도전

눈물은 쓰렸지만 열매는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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