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년 10월 나는 10여년간 이어온 넷피아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이사회 의장이자 C.S.O.(전략담당 최고책임자)의 역할만 하며 벤처를 창업하고 일구면서 얻게 된 신장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잠시 병가를 내어 스테로이드 치료를 위해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의장님, 검찰에서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PC 하드를 50대나 가져가버리고 지금 회사에 난리가 났습니다.”

2005년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신장 치료 때문에 강원도로 요양을 간 내게 한 직원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뭐라고? 검찰? 압수? 그게 무슨 소린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저희도 영문을 알 수 없어요. 의장님께서 건강이 안 좋으셔서 쉬셔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워낙 다급해서 이렇게 연락 드렸습니다. 어쩌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뉴스에서만 듣던 압수수색이 우리 회사에 벌어졌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큰 맘 먹고 회사를 쉬면서 요양을 시작한 첫 날이었건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필 그 날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당장 요양을 취소하고 서울로 향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기왕 회사 일을 맡기고 나왔으니 당분간 잊으라며 말렸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의 서울행이 불만스럽던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 역시도 아내의 걱정이 어떤지 짐작되었기에 말없이 창밖만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한참을 달리는 차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창밖의 늦가을 풍경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쯤 왔을까? 서울과 가까워지고는 있는 걸까? 그때였다. 문득 8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날도 스산한 겨울 창밖을 보며 지친 마음으로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사업을 막 시작했던 나는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망하기 일보 직전에 처해 있었고, 상황은 죽음을 떠올릴 만큼 최악이었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다가도 ‘이대로 운전대를 놓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수차례 했을 정도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 때마다 내 자신이 너무나 처량해서 눈물을 흘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97년 초만 해도 얼마나 꿈에 부풀어 있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2년간 고생해온 보람이 있을 것이란 기대로 가득했었다. 1995년, 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황무지 같았던 인터넷 시장이 1997년에 접어들면서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7월에 컴덱스 코리아 행사에 참여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의욕적인 한 해를 시작했고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했다.

또한 그 무렵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바로 인터넷 PC방 사업이었다. 인터넷 PC방 사업은 본사에 인터넷 지원센터를 구축하고 전국에 지사망을 갖춘 프랜차이즈였다. 당시 전국 30여 곳의 프랜차이즈 지점이 모집되었는데 이들은 1000만 원 가량의 가맹비와 보증금을 냈고, 본사에서는 지사에 인터넷 교육과 컴퓨터 기자재를 제공하였다.

지금이야 유비쿼터스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 사용이 그리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인터넷 PC방은 첨단 업종의 블루오션이었다. 당연히 기대도 컸고, 이제 고생도 끝이 나는구나 싶었다. 정보화에 대한 물결이 조금씩 거세지면서 지사의 확보도 수월했기 때문에 지사를 잘 관리하고 이끌어가기만 하면 안정적인 수익원이 보장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해 연말 그 기대는 보란 듯이 어긋나고 말았다. 인터넷 PC방에 대한 장미빛 꿈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예기치 못했던 복병을 만났으니 바로 IMF 외환위기였다. 갑작스런 국가적 위기로 모든 기업이 어려움과 시련을 견뎌냈겠지만 우리같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벤처기업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각 지방의 지사에서는 아우성이었다. 대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판에 무슨 인터넷 PC방이냐며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섰고, 결국은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30여 곳의 지사에서는 사업을 철회할 테니 보증금을 돌려달라며 계약을 파기해왔고 난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 지사로부터 받은 가맹 보증금은 모두 운영자금에 사용되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렇다 할 수익원 없이 계속된 적자로 직원들에게 월급 한 번 제때에 주지 못한 채 운영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지사로부터 받은 보증금과 가맹비는 직원들의 밀린 월급과 운영비를 대는 것도 부족할 정도의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하니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리도 만무하고 하루하루 지사들의 독촉은 이어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만 참아달라며 사정을 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지사들의 독촉에 견디다 못한 나는 할 수 없이 영등포 뒷골목에 있는 속칭 카드깡을 하는 회사를 찾았다. 500만 원으로 영수증을 끊으니 선 수수료 200만 원을 떼고 300만 원이 내 손에 들어왔다. 터무니없는 액수였지만 그마저도 사정을 봐준 것이라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급전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일부 보증금을 돌려주었지만 사무실의 보증금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당장 쫓겨날 판이 되었으니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한 마디로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몇 년의 고생이 가져온 결과가 빚뿐이란 현실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급전까지 동원하여 지사들의 보증금은 일부 돌려줬지만 다시 급전을 막아야 하는 사태가 계속 이어지다보니 문제는 끊이질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빚쟁이들의 육두문자 섞인 독촉으로 시작해서 독촉으로 하루를 마감하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어렵게 구한 경리직원은 하루도 못 버티고 회사를 그만두었고 나는 나대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내가 혹시 극한 행동이라도 하지 않을까 항상 조마조마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출근을 하던 중, 만삭이었던 아내는 차 안에서 내 손을 가져다가 슬며시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으며 이런 얘기를 했다. “여보, 저곳에서 손수레로 떡볶이 장사를 해서라도 뱃속의 우리 아이는 먹여 살릴 테니 제발 극한 생각만은 하지 말아줘요.” 때마침 차창 밖으로는 학생들이 무리지어 등교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내의 눈물어린 말에 할 말이 없어 그저 앞만 보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며 용서를 구했다. ‘미안하오. 여보! 못난 신랑을 만나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같은 고통을 주어서.’ 결혼 후 장인, 장모님까지 빚쟁이에게 시달리게 되실까봐 아직 혼인신고도 못한 상태에서 아내는 떡볶이 장사라도 해서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며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을 눈여겨봐 두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내게 위로를 건네니 입이 열 개라도 난 할 말이 없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 우리 부부는 큰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때까지도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 결국 큰 아이는 잠시였지만 한동안 호적상으론 엄마 없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들이닥쳤다는 전화에 불안했던 마음은 그날의 일을 떠오르게 했다. 8년 전 절망의 순간에 내가 깨달았던 것이 무엇인가? 절망은 죽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시작되는 것 아니던가.

‘이대로 무너져봐야 내게 남는 게 무엇인가? 실패자라는 오명뿐이다. 넘어야 할 산일뿐이다.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또 한 번 그날처럼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커다란 심호흡을 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 다짐하며…


여는 글

꿈 = 행복


  대표전화 : 02-3665-0123   고객상담 : 02-2165-3000   FAX : 02-2671-5613   e메일 : 고객상담@넷피아콥
Copyright (C) 1995 - 2019 Netpi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