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이론적 깊이가 없을 때 오히려 신선한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론의 제약에 발목이 잡히면 아이디어의 창조에도 한계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인터넷주소에 대한 발상을 떠올리게 된 것도 어찌보면 내가 대학에서 IT 관련 전문 분야를 공부하지 않았던 배경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누구 못지않게 왕성했던 호기심과 모험심이 플러스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남자 아이들 가운데 열의 여덟은 그랬을 테지만 나는 유독 호기심이 많아서 라디오며 시계 같은 것들을 분해해서 살펴보는 사고를 곧잘 쳤다. 대체 저 기계는 속 안이 어떻게 생겼기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또한 시계 바늘이 어떻게 정확하게 움직이며 시간을 알려주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집안에 어른들이 안 계실 때면 혼자서 몰래 라디오와 시계 등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보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

분해를 해본다고 궁금증이 해결될 리는 없었지만 당시 그것은 내겐 큰 놀이였다. 하지만 일명 ‘분해놀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설픈 내 솜씨가 결국엔 들통이 났기 때문이다.

손목시계 하나도 매우 큰 재산이었고 귀했던 시절, 큰 형에게는 손목시계가 하나 있었다. 평소에는 서랍에 모셔두었다가 읍내에 볼일이 있을 때만 잠깐 찰 정도로 귀중하게 다루곤 했던 그야말로 귀금속이었다.

하지만 어린 내 눈에는 그것이 귀한 물건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재미난 물건일 뿐이었다. 늘 호시탐탐 손목시계를 노리고 있던 나는 결국 아무도 없는 어느 날 오후에 손목시계를 내 손에 쥐게 되었다.

안방에 숨죽이고 앉아서 드라이버를 가지고 작은 손목시계를 분해한 후 부품들을 순서대로 죽 늘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손목시계는 흥미롭게도 라디오를 분해할 때와는 전혀 다른 재미가 있었다. 라디오는 막상 안을 열어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었는데, 손목시계는 손에 집기도 힘든 부품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이 어린 내 욕구를 더욱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부품을 방에 늘어놓고 들여다보다가 다시 조립하려고 보니 정밀했던 원상태로 만들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더구나 문살이 엉성한 시골집이라 바람이 불어 작은 나사못 하나라도 휙 하니 날아가 버리거나 잃어버리기 일쑤였으니 부품을 정밀하게 다시 조립하기란 애초부터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 짧은 소견으론 그 작은 못 하나가 얼마나 중요하겠냐 싶어서 대강 대강 맞춰놓곤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조립해놓은 시계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가다가 멈추고, 다시 맞추면 조금 가다가 또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큰 형은 아무 속사정도 모른 채 애지중지 여기던 손목시계가 망가졌다며 굉장히 속상해 했었다.

큰 형의 그런 모습을 모른 척 하고 지켜만 보던 나는 ‘다시 분해해서 잘 고쳐놔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시침을 떼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다시 만지면 잘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큰 형이 들에 나가기만을 기다렸던 나는 또 다시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였고, 그러면서 형의 손목시계 부품들은 한 두 가지씩 점점 없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논에 나갔던 큰 형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뭘 빠뜨린 것이 있어서 들른 모양이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형의 손목시계를 분해해서 잔뜩 늘어놓고 조립하는 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모습을 발견한 형은 갑자기 얼어버린 채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닥쳐올 사태가 짐작이 되었다. ‘앗, 죽었구나.’ 그리고 그날 모든 상황은 내 예상대로 벌어졌다. 나에겐 심하게 맞았던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큰형님은 막내인 나와 15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가장의 역할을 도맡아 하셨고, 중?고등학교 시절의 내 학비도 큰형님이 조달해주었다. 그렇듯 아버지 같은 큰형님과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도 그렇게 사고를 치면서 자랐기에 나름대로 무언가 새로움에 도전하는 모험심도 배우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시계는 망가졌지만 어린 시절 내 호기심을 채워준 형의 손목시계는 참으로 행복한 기억이다.

어쨌든 한글인터넷주소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게 된 계기는 이러했다. 언론을 통해 ‘기업 도메인네임 찾아주기 운동’이 보도되면서 나는 어느새 몇 안 되는 인터넷 전문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1997년 3월 무렵, 한국전산원산하 인터넷주소 전문가들의 모임이었던 NIC Committee 위원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NIC Committee란 대한민국의 국가 코드 도메인인 .kr 관련 정책을 결정하던 일종의 인터넷주소 위원회였는데,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쟁쟁한 전문가들이 참여한 그룹이었다.

그때 나는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주소체계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그 작업을 하면서 초등학교의 인터넷 주소가 매우 복잡함을 느꼈다. 예를 들어 여의도 초등학교의 경우에는 주소에 ‘youido.metro.ps.kr' 같은 긴 영문을 입력해야 했다. 이것은 인터넷 도메인의 태생이 영문 체계에서 유래한 탓이었다. 참으로 불편했다. 그렇게 복잡해서야 초등학교의 홈페이지가 활성화 될 수 있겠는가.

당시 그런 불편함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떠올렸다. 감히 세종대왕과 나를 견주겠냐마는, 우리글을 갖지 못해 불편을 겪는 백성을 어여삐 여기신 세종대왕처럼 나 역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로 도메인을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또한 IBI가 이전까지 주력했던 공익적 성격을 띤 정보화사업의 연장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있는 사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글로 인터넷 주소가 만들어진다면 어렵고 불편한 영문 인터넷주소로 인해 인터넷 사용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기존 도메인 체계의 한계와 더불어 영문 도메인 표기가 비영어권 국가에서 야기하는 인터넷 접근성 저하의 문제점을 절감하였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모색되는 시점에서 보더라도 탁월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메인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내 아이디어를 먼저 타진해보았다. “도메인을 한글로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메인을 한글로? 에이.. 말이 되는 소립니까?” 라며 한결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글로 만들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소리냐는 것이었다.

영문 도메인도 잘 모르던 시절에 한글인터넷주소를 만들겠다고 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영어 도메인은 되고 한글인터넷주소는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 왜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시도조차 하지도 않는 것일까? 내가 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 보이리라! 그리고 모험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초심으로 돌아가니 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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