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은 지긋지긋한 것이라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스승도 없다. 모든 결실의 출발은 항상 가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뛰다가 들어서게 된 사업의 길이 그러했고, 학업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뒤늦게 대학생이 된 것도 그러했다. 가난을 겪었기 때문에 나는 어려움을 견뎌낼 배짱과 오기를 배울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촌놈 근성일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나를 두고 촌놈 근성이 오늘을 있게 했다는 표현을 한다. 가난한 삶 속에서 생활력을 자연스럽게 배우며 자란 근성이 숱한 고비에도 사업을 일구도록 만든 뒷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촌놈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지는 않을까 걱정하지만 나의 촌스런 기질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촌놈 근성으로 지금까지 왔다는 말도 물론 인정하는 바다.

사실 어린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어려움과 가난을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시골 출신 우리 또래들 대부분의 생활이 그랬듯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참 많이 가난했다. 당시는 먹고 사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고 학비가 부족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예사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골에서의 가난은 그냥 생활이었던 것 같다. 어리기만 했던 나는 특별히 부족함을 몰랐다. 아니 풍요로운 것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이 50이 넘어 막내인 나를 낳으신 부모님은 연로해서 경제적으로 힘드셨고, 누나들은 막내둥이였던 나와 나이가 비슷한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에 급급했다. 나 역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조카들 앞에서 삼촌 행세를 하기에 바빴다. 집안 어른들이 나이가 어려도 삼촌은 삼촌이기에 호칭에 대해서 엄격하셨던 탓에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어리고 철없는 삼촌이었던 나는, 언젠가 나보다 4살이 많은 조카가 ‘한번만 누나라고 불러주면 사탕을 주겠다.’고 하여 사탕 먹을 욕심에 누나라고 불러주며 사탕을 받아 먹은 기억도 있다.

꼬맹이 삼촌인 나의 일과는 여느 촌아이들의 그것과 같았다. 늦가을까지는 뒷산에 올라 소 풀 먹이는 일을 다섯 살 때부터 했고, 요즘 아이들처럼 멋진 로봇이며 게임기는 없었지만 손수 나무를 깎아 장난감 총과 칼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하곤 했다. 농사를 돕는 생활조차도 내겐 신나는 놀이였다. 이런 나에게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가난의 고단함을 내색한 적이 없으셨다.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었다.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변 친구들을 보면 그 시절에도 과외를 받으며 입시를 준비했다는데 나는 ‘과외’의 ‘기역자’도 모르며 살았다.

자식의 공부를 지원하고 싶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잘해주고, 좀 더 많이 시키고 싶은 게 부모의 욕심인 것은 어느 때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행여나 우리 부모님이 내가 집안일 때문에 공부에 방해를 받고 있고 그 때문에 미안한 맘을 갖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곤 했다. 때문에 공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시라며 큰 소리를 치며 농사일 또한 즐겁게 도왔다. 그 덕분인지 부모님은 전적으로 나를 믿어주셨다.

하지만 공부에 대해 욕심도 많고 승부욕도 강했던 내가 어찌 남들처럼 공부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상하게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는 바쁜 농번기와 비슷한 시기일 때가 많았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농번기에 장성한 아들의 힘이 얼마나 고마울지는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화장실에서 하는 도둑공부였다. 부모님 앞에서는 시험기간이라는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도왔다. 그리고 화장실에 책을 한 권 놓아두고는 일을 돕다가 화장실에 들를 때마다 책을 펴보며 공부를 했다. 시험기간에 농사일을 거드는 자식의 모습을 보면서 불편해하실 연로한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에 아무렇지 않게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 역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자식이 미안한 맘을 갖지는 않을까 하며 오히려 모르시는 척 하지 않으셨나 싶다. 그것은 나도 부모가 되어 보니 느껴지는 짐작이다.

그렇게 부족하기 짝이 없는 공부였지만 다행?히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부족한 만큼 더더욱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법을 배운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풍요롭지 못했던 그 시절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부족하면 부족한 가운데서 해결책을 찾는 훈련이 되었고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뚝심이 만들어졌으며 창의력으로 키워졌던 것 같다. 요즘의 아이들은 배우기 힘든 산교육이었다.

돈이 없고 완구점이 없으면 장난감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아니라 자연 천지에 널린 게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일 수 있었고, 어른이 되어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겁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환경에 있었던 그 시대의 또래들이라면 모두 공감하는 시대의 유산일 것이다.

때문에 큰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마음 하나만큼은 든든했다. 마치 어린 시절에 놀이감을 찾던 때의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기회가 내게는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언제 내가 제대로 갖춰진 곳에서 시작한 적이 있었던가? 항상 부족함 속에서 내가 그 부족함을 채워가는 인생 아니었던가? 마음만은 그만큼 희망이 넘치고 나름으로는 풍요로웠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인터넷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던 1995년, 바로 지금의 넷피아를 있게 한 IBI호가 출발했다. IBI란 Internet Business Institute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국토는 좁지만 사이버 영토는 세계 최대로'라는 슬로건으로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단지 안의 다섯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출발한 나의 꿈이었다.


막다른 골목에서의 반전

빛의 속도에서 희망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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